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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가은교회입니다. 박바울 목사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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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의 말씀 / 1월 10일 - 16일(3주)

조회수305

2021-01-18

[삼상3:1-9]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엘리 제사장이 늙고 눈도 어두워지고 이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겁니다. 자신에게도 이스라엘에게도 이상이 나타나질수가 없어요. 자신도 자신이지만 두 아들 제사장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재물을 먼저 가서 자신들이 취하고, 그런데도 말 한마디도 못 하잖아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을 향해 멈춰진 적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제사장으로 세웠는데 누구도 별수없는 속힘 속에 복음만 가려진것입니다. 이상이 나타날수 없는 겁니다. 복음만 가려진 상태. 그런 만큼 육신의 죄 가운데 삶이죠. 강팍함.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당신의 구원을 쉬지 않기 때문에, 사무엘은 제사장도 아닌 엘리 제사장 밑에서 돕는 어린 아이입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역사는 쉬지 않기 때문에, 복음만 가려진 만큼 그 일이 엘리 제사장과 두 아들들을 통해 나타날수 없으니까, 어린 사무엘을 통해서 나타내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니라” 사무엘도 자기 수준이 있으니까 육신 속에 별수 없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는게 아니라 엘리 제사장 앞에 뛰어 갑니다. 세번이나.. 여러분 여기에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당신의 구원을 엘리 제사장과 다른 제사장에게 나타낼수 없기 때문에 사무엘에게 나타내셨는데, 그 수준은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것으로 볼수 밖에 없습니다. 세번째, 항상 세번은 완전한 숫자를 얘기 합니다. 수준이 있으면서도 이걸 보면서 ‘믿음으로’ 육신으로 이해가 안되요. 이게 조금 보여지기를 축복합니다. 육신은 두번까지 노력해서 할수있습니다. 세번까지는 못해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나니. 그 믿음은 육신 수준은 못하는데, 뛰어넘게 만들어요. 아니, 믿음으로 살아지는 세계가 있으니! 이것은 믿음과 삶이 하나기 때문에 변화되는 만큼 달라요. 그래서 단순한 복종이 아닙니다.


제가 이전에 신앙 생활 속에 은혜 받고 하나님 사랑할때 “믿음은 복종입니다. 순종입니다.” 행함으로 가르쳐주더라고요. 여러분 은혜 받으면 순종이 됩니다. 순종은 즐거움으로 하는 겁니다. 그건 어려운게 아니라 쉬운 겁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순종도 있지만 때로는 복종도 해야 됩니다. 그 말은 내 마음은 원치 않는데, 그게 다 육신이에요. 제가 그렇게 살았어요. 내가 한 만큼 몰라도 내 의가 따라가요. 내가 교회에 목사에게 한 만큼 의가 목사님이 인정해주지 않는 말과 행동이 안타나났을때 그대로 시험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한 것은 신기해요. 그렇게 살아야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요. 하나님이 하신 것은 나와 상관없는 나를 통해 하신 일이기 때문에 내 기억 속에 없어요. 내 의가 따라갈수 없어요. 하나님의 의만 있는 세계. “믿음으로 믿음에” 이게 달라요. 육신 속에서 믿음으로 행하는것만 모른채 순종한것도 내 의가 따라가고 복종은 더 많을 것입니다. 할수 없는 것을 했기 때문에. 이미 다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말 한마디 속에 조금만 섭섭하게 해도 그대로 들어와요. 쌓여지는 겁니다. 그런 것이 한사람이 아니면 내 의가 쌓여지면 별말이 아닌 것에도 그냥 걸려 버립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면, 살려고 하는데 이게 아니구나. 믿음으로..


육신 세계 속에서 볼때 복종이에요. 이것 마저도 우리가 육신의 의지 속에 맞는 목적을 위하여 주와 복음을 위하여, 있는데, 그걸 통해서 믿음으로 나를 던지고, 안하는게 아니라 하면서.. 그러면 이후에 있어도 하고 난 이후에 어찌할수없는 것이 드러나질때 믿음으로가 과정이 될수 있어요. 이걸 모르고 가면 할때도 모르고 과정이 이후에 드러났을때 그대로 걸려 들어요. 길이 없어요. 조금씩 이지만 믿음으로.. 그래서 사무엘이 세번씩 쫓아 갔다. 여기서 믿음으로 살아지는 세계가 있음이 비록 어리지만, 그 말은 엘리 제사장이 분명 악하고 선한 모습이 있겠죠. 두 아들 제사장도 있겠죠. 육신 세계는 다른거 없어요. 나도 그들과 똑같이 길들여져 가던가 한쪽에서는 좋은것도 있어요. 그 세계 떨어지는 콩고물이 있으니까 육신은 전부다 사람들이 따라 갑니다. 이게 아니면 선악속에 판단 정죄 끝장 내 버려요. 뒤집어 버려요. 갑자기가 아니라. 쌓아가다가 결정적으로.. 큰 문제 연약함속에 빠졌을때 이 때다 하고 드러나 버립니다.


이상이 엘리 제사장과 두 아들에게 안나타나고 얼마나 힘든때입니까. 비록 사무엘이 어리지만 그러한것들 속에 믿음으로.. 이게 없으면 사무엘도 어쩔수 없어요. 둘중에 하나 나와요.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같이 점점 길들여져 가던지. 육신 세계 속에 좋은것도 있으니까. 아니면 쌓아 가다가 결정적 순간에 다 뒤집어 버립니다. 사무엘을 통해 보여준게 뭐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세번씩이나 쫓아 가냐고. 이걸 보고 믿음으로 ‘순종’, 믿음으로 ‘복종’이거든요. 이것은 복을 받아요. 제가 이렇게 은혜 받아가면서 깨달아 가다 보니까. 제가 가끔 가다 말씀 드리지만 제가 그렇게 주와 복음을 위해 살려고 진짜 올인 했거든요. 그건 믿음의 길이 아니에요.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믿음으로만 모르는 거죠. 모르지만 선악 속에서 실컷 해놓고, 복 못 받았어요. 나만 그런게 아니라 같이 믿었던 사람들 쭉 보니까. 보면서 이해 안된것이 지금 이해가 되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완전하구나, 전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뭐가 완전해? 이해가 안돼요. 분명 주안에서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 너희가 앎이라. 다 주 안에서 한줄아는데, 헛되지 않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은 살아가는 모습이나. 실제 나타나는 인생이. 주 안에서가 뭐에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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