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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의 말씀 / 8월 1일 - 7일(32주)

조회수251

2021-08-08

[출2:11-15]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모세가 40세가 되던 해에 있었던 살인 사건 이죠. 이것이 이제는 왕궁 생활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치기 생활하는 모세의 삶으로 완전히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오전에 말씀 드렸죠. 모세의 살인 죄입니까? 아닙니까?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합리화 시킬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복음을 위한 명목으로 참 기독교가 못된 짓을 많이 져질렀습니다. 여러분 십자군 전쟁 같은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그때 당시 얼마나 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게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복음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그런 지도자들 때문에 거기에 같이 휩슬리는 믿는 자들 속에 얼마나 수많은 생명들이 죽었고, 지금까지 저 중동 땅에 이스라엘과 아랍권에서 보면 뭘 보게 됩니까. 지금도 끝나지 않는 전쟁역사 똑같은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뭐에요? 맞아요. '믿음으로 모세는' 이것은 모세의 인생 속에 왕궁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이 하셨던 일입니다. 몰라도 하나님이 하신 일은 오전에 히브리서 11장에 본문을 읽어 드린것 처럼 믿음으로 살아지는 바로왕의 공주의 아들로써, 거절하고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받는 수모를 더 즐거이 하고,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상주시는 이심을 바라봤고 믿었다고 증거하고 있죠. 도대체 뭐가 다른 겁니까? 내가 믿는 믿음 생활이 뭔지 몰라도, 그렇게 내가 살아야 하는 것이거든요. 산 만큼, 똑같이 믿는것 같아요. 하나님이 상주심을 믿잖아요. 뭐가 다른 겁니까? '믿음으로 모세는' 그럼 그게 40년 모세가 성장한 후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 사건이 뭡니까? 하나님이 하신 만큼, 애굽의 바로의 왕궁에서 40년 동안, 살아지는 세계가 있겠죠. 그러나 평생의 과정, 믿음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모른척 할수없는 거죠. 한 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애굽의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 형제로, 형제의 고통이 나와 상관없는 것만 아니라, 형제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믿음으로 살아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오전에 스데반의 설교에서 그 내용을 언급했거든요. 자신은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는 것이 자기의 손을 들어서, 저들의 고통을 돌아 보고 하나님이 그 고통속에 구원하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한 것이라고 했죠. 그것이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모래 속에 감추니라.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데, 자신이 행하는 일을 통해서, 자기 손이 사람 쳐죽인 손인데, 오히려 모세는 내 손을 들어서 하나님이 애굽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구원하시는 일을 깨닫게 하려고 한건데 사람을 죽인 겁니다. 무엇을 보여주신 것입니까? 맞아요. 40년 동안, 애굽왕 바로의 왕궁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다 믿음이겠습니까? 정말로 다 믿음이고 믿음으로 살아지는 것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서도 안되죠. 40년 동안 하나님이 하셨고 앞서 말씀 드린것 처럼 하나님이 모세 인생에 나타내신 것인데, 성경이 뭘 증거해요? '믿음으로 모세는,,' 이렇게 깨달아 간거예요. 우리도 이렇게 깨달아 갔어야 해요. 오전에도 말씀 드린 것처럼 모세의 부모도, 믿음으로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거든요. 아니 핏덩어리 모세, 나이가 많고 적고 알고 모르고, 복음은 하나님이 상관없이 나타내시는 일이라니까. 이걸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셔야해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나타내는데, 사람을 쳐죽입니까? 불신자는 죽여도 괜찮아요? 저도 이전에 선악의 기준속에 최선을 다해서 믿음 생활로 몰아가다 보니까. 불신자들 사람같이 안 보이더라고요. 전부다 마귀의 자녀로 보이죠. 얼마나 불신자를 무시하며 살았겠습니까.

전에도 우리 5남매, 제가 막내인데, 처음에 은혜 받고, 형제들이 구원 받아야겠구나. 그렇게 전도 했는데 절대로 복음만 안 받아들이더라고요. 나중에는 에잇 지옥이나 가라. 그때 부터 무시. 진짜 한 20년 넘게, 오고 가지도 않았어요. 전할일도 없었고, 간간히 해도, 형식상으로, 내 삶이 무엇을 말해 주고 있나요? 불신자와 믿는자 이렇게 나누어져 버렸습니다. 이게 이원론적 삶이거든요. 오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내가 세상을 무시한다고요? 세상이 나를 무시해 버려요. 세상과 안 맞는 사람, 지구에서는 안 맞아요. 얼마나 세상이 나를 무시하는지, 그 말은 세상 속에 있는 불신자? 내가 불신자 무시하는 만큼 불신자가 나를 무시해 버려요. 돈을 무시한다고요? 돈한테 당해요. 그 세계는 몰라도 그게 세상이고, 세상 속에 살아가는 불신자이고, 경제이기 때문에, 그건 믿음이 아니면 못 이겨요. 그럼 무시하다가, 서서히 세상속에 잡혀 들어가요. 불신자 눈치 보며 살아가요. 돈에 종노릇하며 살아가요. 그런데도 무시하며 산다? 그게 종교 괴물이지. 한 마디로 혼자 잘났어. 다 무시하고 사니까. 그런데 무시가 되야지, 자신이 무시 당하지. 참 평생 그러다가 갈뻔 했잖아요. 자기 의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수가 없어요. 자기 의 때문에,, 맞아야되요. 그래서 맞는 줄알고 끝가지 달려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인간의 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바리새인의 의를 통해서 보여준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율법에 흠이 없을 정도로 살았습니까? 내가, 내 의가 하나님 앞에 세워진 만큼 몰라도 하나님의 의를 대적한다는것이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보냈을때 그리스도를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거예요. 얼마나 무서운 겁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저들은 예수 안 믿은 그래서 저들의 의와 내 의가 다르다고 생각 하거든요. 아니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모세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뭐냐. 평생의 과정이지만, 40년 동안 믿음으로 모세는 모세에게만 하신 일이 아니거든요. 모든 믿는 자들 속에 하나님이 동일하신 일을 모세를 통하여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는 겁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있는 만큼 이것을 40세 되던 해에, 지금 이 사건이 어느날, 자기 형제들의 고역하는 곳에 가게 된거죠. 마침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기 형제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보게 됩니까? 그 사건만 안 일어났어도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을텐데, 아니에요. 그 사건이 없어도, 없었어도, 모세 안에 있는 세계는 있는 문제에요.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만나지게 되는 것이고 만나지는 일을 통해서, 자기 수준이죠.

[행7: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우리는 이것을 사명감, 소명감이라고 하거든요. 우리 이전에 집회 같은데 은혜 받고 목사님들이, 자 소명 받은 사람 나오십시오. 그때 강대상 나가서, 안수 기도 받고, 그때 우리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아골골짝 빈들에도 빈손들고 가오리다. 그런 면에 얼마나 모세가 믿음 있습니까? 소명에 이끌려, 이스라엘 자기 형제가 받는 고난, 그것도 애굽 사람이.. 못 견디겠는 겁니다. 한것이 뭐라고요?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죽이고 모래에 매장 시킨 겁니다. 그 다음날 떠나 갔다고 했죠?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하나님이 드러내 버리신 거거든요. 만약에 안 드러났더라면 여럿 죽었을것 같아요. 왜? 드러나지 않으면 계속 해요. 자기는 구원한다고 하는데 오히려 자기는 죽이는 손을 통해 하나님이 구원하는 손으로 깨닫게 하려고하는데 계속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모르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그랬습니다. 은혜 주신 만큼, 그런 만큼 사명에 붙들린 만큼,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냐? 역사하심이 없었냐? 있었어요. 많은 열매도 있었습니다. 그 정도 수준은 문열고, 영접 되는 수준은 가능할수 있어요. 아니 내 수준 정도 까지는 도와줄수 있어요. 그런데, 내 수준의 부분적인 것만 알고 부분적인 것속에서 하는 것은 모르고, 그런 만큼 전체를 보지 못해요. 그 말은 뭡니까? 지금도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이 뭐에요? 앞으로도 하나님이 하실 일이 뭔가요? 이걸 모르면, 오늘 본문에, 이건 애굽인이고 형제고 상관없습니다.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데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 드렸죠. 제가 중국 선교 들어가기 전에 대전과 서울에 있을때 가는곳 마다 전도 왕이었다고, 평신도 인데 사실은 조그만 목사 처럼 살았어요. 아니 은혜 주신 만큼 믿음으로 살아지는 믿음으로 행한 것도 있는데 오히려 나는 그러한 일들 속에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만 모르는 만큼은 내가 그렇게 믿어야 되는, 행함을, 믿음생활과 살아가는 인생과 모든 일 속에서 힘써 몰아가는 만큼은 한쪽에는 보람도 있었고 또 하나님이 주신 은혜도 있었고, 위로도 있었고, 좋은것 많았어요. 제가 말씀 드렸죠? 한참을 지나고, 솔직히 제가 사명에 붙들려서 중국에 들어갔죠. 중국 선교 하겠다고, 사실 그때 까지도 몰랐습니다. 단기 포함해서 17년 동안, 하나님은 변함없이 내 인생속에 또 중국에서 역사는 많이 일어났죠.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그게 아니었더라고요. 내게 구원을 이루어주시는, 그런 만큼 나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가시는 조금씩 이지만 그렇게, 믿음으로, 그때서야 중국 들어가기 전에 대전에서 서울에서 이게 뭔지 알았어요. 이후에 그 사람들 찾아가 봤잖아요. 그들을 보면서 한쪽에는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회개의 눈물. 왜? 내가 저들을 앉은뱅이 만들어 놨구나. 나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저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내가 가로 막고 있었구나. 이후에 저들을 만나 보니까, 너무나 기뻐하면서 하는 말이 그때가 너무나 좋았어. 그래서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조금은 하나님이 내 인생에 항상 하셨기 때문에 조금씩은 그런 은혜를 받아온 만큼 이것을 저들에게 조금 말을 해 보지만, 들어갈 틈이 없더라고요. 나누어질 세계가 없더라고요. 배나 더 지옥 자식 만들었구나.

여러분. 이건 하나님의 일이나, 믿는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정이든, 산업이든, 무엇인든, 똑같습니다. 조금씩이라도 믿음으로 나는! 뭐가 다를까요? 이걸 하나님이 내 인생속에 구원을 이루어주시는 조금씩이지만 믿음을 배워가면 그 믿음은 이미 행함과 함께 일하는 믿음으로 살아지는 세계가 있음이,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가 믿는 자의 인생을 살아 주시는 이게 세상 속에서 살아지는 비밀로, 평생의 과정인 만큼 맞아요. 오늘 본문 말씀 처럼, 아직도 내 안에 세계가 있는 만큼 이런 일이 만나져요. 이끌리기도 하고. 만나지기도 하고, 만났을때 어쩔수없어요. 선악의 기준속에 그럼 자신만 몰라요. 속고 있는 세계의 문제, 모르는데도 속일수없는 사실로 드러내 주세요. 멀리 보지 않으셔도 되요. 부부가 살아가고 있으면서 나타나고 있는 거니까. 가정을 이루어가면서 나타나고 있는 거니까. 아니에요. 사람 관계 속에 드러나고 있는 거니까. 이것 때문에 우리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는것 아닌가요? 그 세계 다른거 없습니다. 죽여야해. 사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상대를 죽인다고, 그래서 여러분 이 세계는 다 자기는 자신만 몰라. 내로남불. 다 남탓을 하게 되는 겁니다. 왜 그래! 그게 자기 의로 살고 있는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건데, 자기 의의 분노인데, 자기 의의 맞고 틀림 속에 자신만 모르는 남의 잘못된것만 지적하고 정죄할수 밖에 없는 모습인데, 자기 형제를 괴롭게 하면 안되거든요. 그런데 저 애굽 사람이 괴롭게 하고 있네? 쳐죽였잖아요. 이게 뭐에요? 선악 속에!